전세계적으로 러시아산 무기 의존도를 줄이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한국 방산업체들이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인 먹거리였던 반도체 부문의 최근 수출 부진까지 메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26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한국 방산기업들이 폴란드 정부로부터 140억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계약을 따낸 것을 계기로 한국 방위 산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수십 년 동안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해온 방산 부문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분석이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 31위에서 2022년 세계 9위의 무기 판매국으로 올라섰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3대장을 필두로 세계 10대 방산 수출국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무기에 대한 수입 의존도를 줄이려는 서방과 아시아 국가들이 한국산 무기로 대거 눈을 돌렸다.
한국 방산기업들은 서방의 다른 경쟁사들보다 대규모로 무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탱크와 곡사포 등의 공급에 있어 더 나은 가성비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FT는 “해외 수출 물량이 없을 때도 생산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주문량을 늘리는 등 한국 방산업체들은 자국 정부로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은 2000년대 이후 무역수지에서 흑자 행진을 이어왔지만, 최근 몇년 새 반도체 부문 침체 등으로 타격을 입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방산 부문의 확장이 한국 무역 지형도에 활로를 열어주고 있다는 게 기사의 분석이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양욱 국방 전문 연구위원은 FT에 “한국이 자금 측면에서 다른 무기 수출국보다 훨씬 더 관대하다”며 “한국수출입은행 등 수출 신용 기관이 매력적인 조건으로 포괄적인 금융 패키지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한국 국회는 최근 수출입은행의 법정 자본금 한도를 높이는 내용의 법안 논의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방산업체들에서 견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한 대표 방산업체 아시아 담당 임원은 “가격과 납품 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고, 실제 우리의 사업 물량도 일부 빼앗겼다”고 했다.
유럽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공격적인 진출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산 주권을 회복하려는 역내 노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임원은 “당장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도움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 지원을 등에 업은 한국 기업들이 재무제표가 튼튼하지 않은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방 방산업체의 우려와 달리 서방의 방산 부품 업체들에는 호재라는 반론도 있다. 한 서방 국방 관계자는 “필리핀과 베트남 같은 국가는 미국 정부의 불허로 인해 미국산 F-35 전투기를 구매하지 못하지만, 대신 그들은 영국과 미국의 키트가 장착된 한국산 KF-21을 수입할 수 있다”며 “그 경우 모두에 윈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