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토요일 밤 10시쯤 태국 방콕의 유명 유흥가인 카오산로드의 밤. 400m 남짓한 도로 위에 길거리 식당과 클럽, 유흥업소 등이 현란하게 줄지어 섰다.
세계 배낭여행객의 성지라 불리는 명성에 걸맞게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현지인과 뒤섞여 거리를 누비고, 노상 테이블에서 흥겹게 술을 마셨다.
한류 열풍을 반영하듯 클럽과 술집 곳곳에서 K팝이 흘러나왔다. 한 태국인 남녀는 아예 ‘건배’라는 상표가 붙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길거리 호객꾼들도 한국인 관광객들을 붙잡고 메뉴판에 써있는 ‘Soju’를 가르키며 연신 손짓을 해댔다.
카오산로드의 술집에서 소주 1병의 가격은 통상 200바트(약7400원). 다만 이들 술집에서는 한국산이 아닌 태국산 짝퉁 소주를 판매한다.
한류 열풍을 타고 태국 등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 소주 유행이 지속되자 이를 겨냥한 ‘짝퉁 소주’가 덩달아 부상 중이다.
한국 소주를 상징하는 녹색병에 한국인들도 착각할 정도로 꼭 닮은 우리말 라벨을 부착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산보다 가격이 30% 이상 저렴해 현지 술집 등에서 선호된다.
관세청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소주 수출액은 1억141만 달러로 전년 대비 8.7% 증가했다. 소주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넘어선 건 2013년(1억751만 달러) 이후 10년 만이다. 한국 문화가 인기를 끌자 한국을 상징하는 소주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국가별로 보면 일본과 뒤를 이어 베트남(793만 달러), 필리핀(447만 달러), 말레이시아(223만 달러) 등 동남아 지역으로의 수출이 호조세다. 태국(192만 달러)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데, 짝퉁 소주가 판을 치며 한국 소주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동남아 국가에서는 국내에서는 인기가 떨어진 과일 소주가 인기다. 일반 소주는 독주로 여겨져서다. 롯데칠성음료 등 국내 주류회사도 이에 국내에는 출시하지 않는 순하리 요구르트 딸기 맛 등을 수출용으로 제작해 유통하고 있다.
다만 현지 물가 대비 한국 소주는 고급 주류로 여겨진다. 이에 현지 주류회사들이 한국 소주를 모방한 비교적 저렴한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한국 소주병과 같은 360ml 녹색 병에 한글 라벨을 부착시키고, 공식 사이트 주소를 한국식(kr)으로 쓰는 등이다.
백화점 식품코너 등 대형 유통사에서도 이들 ‘짝퉁 소주’를 취급한다. 다음날 찾은 방콕 대형 쇼핑몰 엠스피어 지하 식품매장에서는 건배, 태양, 찾을수록, 순한 charm 등 다양한 종류의 가짜 소주가 판을 쳤다.
한국 소주와 비슷하게 알콜 15%는 프레쉬로 이름 붙였고, 그 외 사과·딸기·복숭아 등 다양한 맛의 과일맛 소주들도 즐비했다.
심지어 대마초 성분(CBD)이 들어있다는 표시가 붙어있는 니르바나 하이라는 이름의 소주도 버젓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 마트에서 진로 참이슬 가격은 한 병에 139바트(약 5100원). 짝퉁 소주들의 가격은 87바트(약 3200원)로 약 40%가량 저렴했다.
언뜻 보면 우리 소주인 것만 같지만 이들 제품은 모두 한국과 전혀 무관하다. 건배의 경우 태국의 주류회사 ‘타이 스피릿츠’에서 현지 생산한다. 현지 대기업도 짝퉁 소주에 손을 댄 경우가 있다. 태양은 태국의 에너지 드링크 대기업 카라바오가 생산, 유통하는 제품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짜 소주가 동남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외 다른 국가까지 수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류업계에서는 주질이 보장되지 않는 가짜 제품이 난무하는 것이 한국 소주 이미지를 해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소주의 경우 HACCP이나 ISO 등 기준에 따라 공장시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 검증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아닌 것들에 대한 주원료의 품질면에서 보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이다.
또 국내 소주 제조사 보다 불순물을 거르는 기술력이 현저히 떨어져 맛의 품질이나 심한 숙취를 유발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주류업계는 국세청과 협업해 ‘한국소주 인증마크’를 논의 중이다. 한국소주임을 명확히 인증하는 마크, ‘K-SUUL’을 붙여 가짜 한국소주와 구별하자는 전략이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가짜 소주가 한국 소주 수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 저렴한 가격때문에 현지 자영업자들이 선호하는 터라 현지 소비자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면서 “인증마크를 도입해 한국 소주임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